사랑이 아닌 적이

후숙이 잘 된 사랑

2Sail 2024. 9. 16. 22:35

그이가 추석 선물로 받아 온 멜론 박스가 문 앞에 놓여있었다. 어이구, 무거워라. 두 손으로 번쩍 들기는 쉽지 않았고 밀고 끌며 안으로 들여뒀다. 조각난 멜론을 먹기만 해 봤지 아는 게 통 없어 보관 방법을 검색했다. 현관에 놓인 택배 박스는 말이 없으니까 말이다. 실온에서 후숙을 했다가 먹어야 달댄다. 아하, 얘는 냉장고에 당장 넣으면 안 되는구나.
 
사랑은 어쩌면 멜론인 걸까?
무겁고도 튼튼한 택배 박스 안에 실린 사랑. 열어서 반을 가르기 전까지, 아니, 먹기 좋게 잘라 입에 쏙 넣기 전까지 맛을 모르는 사랑. 익을수록 단물이 나는 사랑. 입에서 살살 녹는 게 아쉬운 사랑. 깎는 건 내가 할 테니 저 무거운 걸 들어다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당연하게 알겠다고 해주는 사랑. 칼을 쓰는 동안 다치지 않길 바라는 사랑. 가장 맛있는 부분을 골라 먼저 먹여주고 싶은 사랑. 꽁꽁 언 메로나를 한입 베어 물었을 때 마주한 반듯한 잇자국을 보며 함께 웃어주는 사랑.
 
흠. 달디달고 달디단 사랑, 당신.
사랑은 사람으로 구체화되고, 그 사람은 당신이더라.
 
냠.